노예 12년 (2014)

12 Years a Slave 
8.1
감독
스티브 맥퀸
출연
치에텔 에지오포, 마이클 패스벤더, 베네딕트 컴버배치, 브래드 피트, 루피타 니용고
정보
드라마 | 미국 | 134 분 | 2014-02-27
다운로드

 

 

 노예 12년. 이 영화는 어쩐지 실화입니다. 흑인을 소재로 한 영화들 중 가장 전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씨네21의 주성철 기자의 한줄 평이 눈에 듭니다. "사적인 별책부록보다 대중적인 교과서를 택한 매퀸". 같은 소재이지만 또 다른 영화인 <장고:분노의 추적자>를 보면, 그 시대의 흑인을 특이하게 폭력과 주체라는 것을 동시에 가진 사람으로 보고 이야기를 진행합니다. 아마도 <장고>같은 영화들이 별책부록이겠지요. 반면에 <노예 12년>의 주인공인 솔로몬 노섭은 장고와 매우 대조적입니다.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나왔듯이, 직접 채찍을 들고 다른 노예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에서 그는 매몰차지 못하고 어리숙하기만 합니다. 그 어리숙함. 영화는 실화이기 때문에 이렇게 이야기할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노예 12년>의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속아넘어가버린 솔로몬이 남부로 노예로 팔려가 자유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입니다. 이 과정 속에서 시대적 배경은 어떠했는지,자유란 무엇인지, 흑인은 어떤 상황이었는가를 감독은 교과서처럼 펼쳐냅니다.

 

 먼저 이 영화의 단순한 시대적 배경은 19세기 미국입니다. 이 때 미국의 북부는 자유를, 남부는 노예를 선택했었지요. 감독은 이러한 위, 아래의 관계를 계속해서 표현합니다. 처음으로 나타나는 장면은 밤에 여자가 솔로몬에게 찾아오는 장면에서 볼 수 있고, 백인들이 흑인을 목매다는 장면도 그러한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목화밭에서 말타고 흑인들을 감독하는 장면도 그렇구요. 이런 관계는 영화 속 성경에서도 나타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예수와 군중, 주인과 종의 관계로 나타납니다. 포드가 성경을 읽어준 후 인디언들을 만나는 장면은 의미없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모르는 인디언들은 오히려 행복하거든요. 

 

(농장주-노예 관계는 성경 속에서 예수-군중, 주인-하인의 관계처럼 위-아래의 구조를 갖습니다. 사진처럼말이죠.)

 

 

(솔로몬의 몸의 윗부분은 죽어 자유로운 듯 보이지만, 아랫부분은 살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여야 합니다.)

 

 

(앞선 사진처럼 위, 아래의 상태일 때 불행하고, 그 다음 사진처럼 평행하게 놓여있을 때는 행복한 상태입니다.) 

 

 이러한 불안감과 대립으로서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모순'적인 상황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모순의 코드는 영화 속 내내 깔려있습니다. 주인공의 진짜 이름이 솔로몬 노섭인데, 플랫으로 불려야 하는 모순, 포드의 땅에서 일어난 일임에도 불구하고 포드가 불안해해야하는 상황, 역전적으로 재해가 와서 편안해진 노섭의 상황, 그리고 전체적으로 노섭이 진짜 자신임을 증명하는 게 자신이 잘하는 바이올린도 아니고 그저 자유인증명서인 점도 또한 모순 코드의 확장이겠지요. 이런 모순을 계속해서 상기시킴으로써 영화는 그 시대의 불안감과 대립의 상황을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또 하나 <노예 12년>이 풍자하는 점은 바로 돈에 대한 열망입니다. 엡스가 노예들을 평가할 때 보는 것은 얼마나 많은 목화를 수확했는가입니다. 특히 펫시가 다른 노예들보다 2배이상의 능률을 보이죠. 그런 그녀를 엡스가 좋아하는 것은 우연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또 돈의 움직임은 노섭을 조금이나마 괜찮았던 포드라는 주인에서 잔혹한 앱스로 움직이게 만들기도 했지요. 뿐만 아니라 이 돈에 대한 풍자는 영화에서 당하는 입장인 흑인도 비켜가지 않습니다. 마치 신분상승한듯한 흑인 마님이 그러했고, 놀랍게도 노섭이 이렇게 된 연유는 돈에 유혹되서이니까요.

 

 

 이 '돈에 대한 열망'은 핑계도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청교도적인 마인드가 그것입니다. 영화에서 성경으로 표현되는 청교도적인 면은 돈 버는 것을 합리화시켜주고, 노예제를 정당화시켜주고, 한 사람을 물건으로 전락시키는 근거로 역할합니다.

 

 <노예 12년>은 많은 이러한 모순과 그로인한 상태를 반복적으로 관객에게 보여줍니다. 마치 우리나라 교과서에서 일제강점기를 이야기하듯이 말입니다. 물론 그 핍박의 사실들은 잊어서는 안될 과거이지만, 교과서가 문학작품이 아니듯 이 영화도 영화로써의 큰 의미를 갖기 힘들어보입니다. 솔로몬 노섭 주인공을 제외하면 다른 흑인들의 상태는 계속해서 노예라는 점과 모든 캐릭터들이 평면적인 성격을 갖는다는 점, 그리고 시작에 비해 임팩트없는 결말이 아쉽습니다. 또 유명한 배우들이 많이 출연하는데 전작들의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월드워 Z>에서 세계를 구하는 브래드피트는 <노예 12년>에서도 마찬가지로 구하는 역할이고, <X맨:퍼스트클래스>에서 고집스런 매그니토역을 맡았던 마이클 패스벤더 역시 굽힐줄모르는 농장주 역할로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교과서적이다'라는 말이 어울리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posted by 상도동너구리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2014)

Dallas Buyers Club 
8.9
감독
장 마크 발레
출연
매튜 매커너히, 제니퍼 가너, 자레드 레토, 달라스 로버츠, 스티브 잔
정보
드라마 | 미국 | 117 분 | 2014-03-06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은 투우를 보는 장면과 함께 시작합니다. 어둠 속에서 여자들보다 투우에 집중하는 주인공 우드루프가 어떤 인물인지 보여줍니다. 이후 그가 어떤 사람인지 능수능란하게 요악하는데요, 그의 모습은 겜블러, 경찰을 이용할 줄도 알고, 마약도 하는 모습입니다. 그런 그가 에이즈 판정을 받고 30일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됩니다.

 

 영화에서 인상깊은 장면은 그가 생업에 종사하면서 불법노동자가 다쳤을 때입니다. 주인공의 성향을 말해주는 동시에 영화를 한방에 설명해주는 장면입니다. 불법노동자가 다리가 잘렸을 때, 우드루프의 동료가 묻습니다. "구급차 불러야하나?", 노동자를 불법으로 만든 제도가 먼저인가, 사람이 먼저인가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합니다. 우드루프는 선택과 동시에 그 상황이 에이즈로 인해 자신에게로 적용되버립니다. 찰나의 장면 전환은 정말 인상에 남습니다.

 

 또 영화는 영화적인 관습에서 벗어나려고 대단히 노력한 듯 보입니다. 큰 병에 걸린 사람은 고결하게 죽는 것과 다르게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에서 우드루프가 택하는 방식은 순수하지 못합니다. 약을 빼돌려서 복용하고, 술, 마약, 여자도 끊지 못하지요. 그런 것을 잘 보여주는 장면은 우드루프가 마치 기도를 하는 것 같이 보이는 장면입니다. 교회가 아니라 스트립클럽이죠. 더해서, 영화는 자칫 미화될 수 있는 술, 마약, 여자 같은 것들을 맥커니히의 앙상한 몸을 통해 부정합니다.

 

 

 30일 시한부선고를 받은 우드루프는 다른 치료법으로 생존해 미국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됩니다. 약을 판매하는 것과 막으려는 FDA와의 싸움이 주를 이룹니다. 이를 통해 영화는 흔히 봐왔던 고결함에서 사회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영화로 나아가게 된 거라고 생각합니다. 또 영화는 게이의 등장으로 한 층 더 풍부한 의미를 가집니다. 영화의 배경인 1985년은 분명히 게이를 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을 테니까요. 우드루프의 방안에 채워진 여자사진들 속에 게이를 몇 장 끼워 넣듯이,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게이도 똑같은 사람이란 것을 보여줍니다.

 

 또 영화는 놀랍게도 갈등에서 FDA나 우드루프, 한 쪽의 편을 들지 않습니다. 재판에서는 FDA가 이기지만 우드루프는 분명 30일을 넘어서 7년을 살았고 펩타이드T라는 약을 허용하게 됐으니까요. 이런 놀라운 것을 가능케하는 우드루프의 힘은 '카우보이 모자'에서 비롯됩니다. 원피스의 루피가 밀짚모자를 절대 잃어버리지 않는 것처럼 루드우프도 모자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것의 상징성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영화는 첫 장면에서 모자의 상징성을 가져옵니다. 바로 투우장면에서요. 맹렬히 뛰는 소 위에 올라 탄 사람은 몇 초 이내로 나가떨어질 수 밖에 없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올라타는 그 '도전'하는 힘을 영화는 카우보이 모자로 나타냅니다. 그래서 <댈러스 바이어스 클럽>의 마지막 장면은 투우 위의 우드루프의 모습으로 마무리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좀 더 루드우프를 깊이 보면, 그 도전 정신의 밑거름에 기독교적인 것을 깔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첫 장면은 30일을 넘기고 마치 살아돌아온 것처럼 보이는 루드우프의 모습이 닮아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당시의 지배적이었던 생각을 뒤흔들었듯, 루드우프도 기존의 생각에 저항하고 있는 모습도 닮아있는 것 같습니다. 또 의사의 이름이 'Eve'라는 겁니다. 게다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는 우드루프는 목사로 변장합니다. 마치 미국으로 들어오는 메이플라워호의 선원들이 청교도적인 신앙을 가지고 온 것과 비슷합니다.

 

 결론적으로 영화는 갈등에 도전하는 모습을 이상적으로 보고 있으며, 그 도전의 밑바탕에는 청교도적인 신앙심을 가지고 있는 영화겠습니다. 영화가 좋았던 점은 이야기가 치우치지않고 균형감이 있다는 점, 주인공과 자레드 레토의 연기, 실화라는 점이 좋았습니다. 또 삐소리(이명)를 이용한 장면전환과 그 과감함은 인상이 남습니다. 반면에 아쉬웠던 점은 갈등이 확장되고 진행되는 때에 늘어지지 않나하는 생각과 굳이 자막을 이용해야 했는지 의문이 남습니다.     

 

 

 

 

 

 

posted by 상도동너구리

 

 

 

주인공 르윈은 고양이를 닮았습니다. 고양이는 강아지랑 다르게 사회화를 시키기 어렵다고 합니다. 고양이에게 무조건적인 복종은 주인과 고양이에게 혼란만 낳을 뿐이라는군요. 또 청력에 민감한 점, 자기 영역을 가지고 다른 것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도 비슷합니다. 왜 고양이일까의 답을 조심스레 추측해봅니다.

 

영화에서 고양이와 르윈은 골파인 교수의 집에서 잠에서 깸과 동시에 만나게 됩니다. 그리곤 문이 닫히는 바람에 르윈이 데려가게 됩니다. 이 고양이를 엘레베이터의 남자는 자신이 일이 있어서 돌봐주지 못한다고 하고, 골파인 교수의 비서는 "Llewin is a cat" 이라며 고양이를 르윈으로 착각하는 듯한 말을 합니다. 이로 보아 고양이는 르윈과 르윈의 직업에 대한 것일 수 있겠지요.

 

 르윈이 가지고 있는 직업은 가수입니다. 그가 노래하는 장르는 포크송입니다. '새롭지는 않지만 결코 낡지 않는 것'이 바로 포크송이죠. 튀지 않는 장르를 가져서인지 그는 다른 사람들의 집의 소파를 전전하는 신세입니다. 게다가 르윈은 성공하는 노래를 전혀 알아보지 못 할 뿐아니라, The Gate Of Horn에서 처럼 돈 될 노래를 하지 않습니다. 또 위대한 사람을 부르겠다고 소개할 때 자신인 줄 착각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런 점들이 르윈이 가지고 있는 직업에 대한 생각을 나타냅니다. 음악에 대한 자부심이 바로 그것이지요. 때문에 음악에 대한 자부심은 고양이로 몸을 갖게 된 것이라고 봅니다.   

 

 

자존심있는 르윈이 여러 집을 옮기며 사는 이유는 바로 돈이 되지 않는, 그러니까 사회가 알아주지 않는 음악을 하기 때문입니다. 음악적 자존심인 고양이 또한 집을 나가고 싶어하는 장면이 두 번 나옵니다. 때문에 집은 사회를 뜻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르윈도 사람이니 사회에서 완전히 나올수도 없으나, 음악적인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완전히 사회에 융화될 수도 없는 상태인거라고 생각합니다.

 

잃어버렸던 고양이는 르윈 앞에 다시 우연히 나타납니다. 하지만 르윈의 음악적인 자부심은 변질되어 가고 있습니다. 고양이의 성별이 바뀌었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르윈은 서쪽으로 사회에서 인정받아 성공하는 꿈을 가지고 떠납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아메리칸 드림이 늘 그려지듯이 마약에 쩔은 뚱보와 거짓말쟁이 아저씨와 같은 차를 타게 됩니다. 때문에 여행 중간에 변질된 꿈과 남자들을 버려두고 시카고에 도착하는 거죠. 그러니 도착한 The Gate Of Horn에서도 Mr.Kennedy같은 노래가 아니라 뜬금없는 가사의 노래를 부르고, 팀에 들어가라는 권유도 거절하고 나오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고양이는 상처를 받고 르윈은 배를 타려고 합니다. 그리고 고양이는 골파인 교수의 집으로 돌아가고, 르윈도 교수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로써 여정이 마무리됩니다.

 

그리스 신화를 덧붙이자면, 고양이의 이름인 '율리시즈'는 오디세우스를 가르킵니다. 또 오디세우스라는 말은 미움받는 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신화에서 오디세우스는 신의 미움을 받아 12년이나 고향으로 돌아오기 위해 고생을 합니다. 그리고 이런 메타포는 본질로 돌아가기 위한 여정에 많이 쓰입니다. 그 용례가 <율리시즈의 시선>이나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에서 나타납니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문에 돌아온 르윈은 다시 카페에서 노래부릅니다. 이때 노래는 'Hang on me'에서 끝나지 않고 한 곡 더 부릅니다. 'If I had wings'.

 

 

<인사이드 르윈>은 장면이 잘 사용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로, 처음 장면에서 르윈이 노래를 부를 때 그를 비추는 무대 조명은 한 개입니다. 그리고 긴 이야기 후 르윈은 두 개의 조명 밑에서 노래를 부릅니다. 또, 르윈의 첫 매니지먼트 회사, 진의 집은 들어가기 전 많은 계단을 오르는 장면이 르윈의 상황을 잘 묘사해줍니다. 그리고 군인이 집을 나설 때는 마치 성공하러 가는 것처럼 해가 앞에 놓인 반면 르윈이 배를 타러갈 때는 해가 뜨는 반대 방향으로 걸어갑니다. 마치 아버지들의 출근길들이 비슷하게 묘사되듯이, 군인과 르윈의 돈을 벌러가는 모습은 비슷합니다. 마지막으로 좋았던 장면은 르윈이 고양이를 안고 지하철을 탔을 때입니다. 르윈이 율리시즈를 안고 탔을 때는 르윈을 보는 어른은 기분 좋지 않은 표정으로, 아이들은 좋은 표정으로 봅니다. 그러나 율리시즈가 아닌 고양이를 안고 있을 때는 오직 어른만이 좋지 않은 표정으로 바라봅니다. 고양이가 없을 때는 아얘 쳐다보는 사람조차 없죠. 음악을 보는 시선을 잘 표현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런 것들로 보아서 <인사이드 르윈>은 깊이를 가지고 있고, 훌륭한 장면들로 깊이를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또 음악도 듣기 좋았고, 계속 진지한 게 아니라 적절한 유머도 사용되어 지루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분명히 여러번 볼만큼의 가치가 있는 영화입니다.

 


인사이드 르윈 (2014)

Inside Llewyn Davis 
8.3
감독
에단 코엔, 조엘 코엔
출연
오스카 아이삭, 캐리 멀리건, 저스틴 팀버레이크, 이단 필립스, 로빈 바틀렛
정보
드라마 | 미국, 프랑스 | 105 분 | 2014-01-29
다운로드

 

 

 

posted by 상도동너구리

 

 

 영화를 보고, 또 보고, 또 봐도 이해하기 힘든 작품입니다. 이유는 <케빈에 대하여>가 많은 것들이 익숙하지 않아서겠지요. 가장 먼저 저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은 감독입니다. 린 램지, 이 영화 이전에는 들어보지 못했으나 영국에서는 이미 젊은 거장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감독이 이야기를 조명하는 방식 또한 익숙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우디 앨런의 <블루 재스민>처럼 인물이 지금의 현실에서 과거로 회상하는 방식을 취하는데, 회상하는 영화들이 대부분 시간적인 흐름이나 인과를 지키는 반면에 <케빈에 대하여>는 최소한의 시간적인 설명도 부족합니다. 게다가 파편적인 많은 사실들이 나오기도 합니다. 파편적인 사실들을 묶어주는 유일한 것은 바둑에서 한 게임이 끝나고 복기해보는 것과 비슷합니다. 에바는 무엇때문에 이런 사건이 일어났는지 복기해보는 겁니다.

 

 처음 그녀가 복기하는, 그러니까 영화의 시작 장면은 토마토축제입니다. 영화를 관통하는 붉은 색의 시작이기도 하구요. 처음 축제 장면은 즐겁게 비춰집니다. 그러나 에바는 사람들 위에서 즐거워하다가 이내 비명과 함께 바닥으로 내려옵니다. 이 과정은 에바가 겪는 과정과 같습니다. 에바의 직업은 사람들에게 추켜세워질만한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케빈을 임신하게 되면서 에바는 자신이 원하는  직업, 여행, 자신의 생활 같은 것들을 포기하게 됩니다. 전설적인 모험가에서 누군가의 아내로, 사람들의 손에서 내려온 거죠. 

 

 

 이것에 대한 분노는 에바가 지도로 채운 자신의 방을 어린 케빈이 망쳐놨을 때 잘드러납니다. 에바가 방에 대해 언급한 것처럼 방은 사람들의 내면을 나타냅니다. 에바가 방을 지도로 꾸민 것은 케빈을 갖기 이전 추앙받는 모험가로 돌아가고 싶은 욕구의 표출입니다. 그러므로 에바에게 꾸며놓은 방을 망쳐놓은 케빈은 큰 장애물로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겁니다. 케빈은 이것을 태어나기 전부터 느꼈을 겁니다. 틸다 스윈튼이 고통을 느꼈을 때와 같은 표정으로 임신한 상태를 연기하는 게 그런 이유입니다.

 

 케빈때문에 적절히 욕구를 표출하지 못한 에바 밑에서 케빈 또한 적절한 욕구의 표출을 모릅니다. 때문에 욕구를 표출하기 위해서 생리현상부터 시작해서 갖가지 말썽을 부립니다. 그러다가 유일하게 적절해 보이는 활을 쏘는 걸 취미로 삼게 됩니다. 이 때 엄마에게 안기죠. 그러나 성장한 케빈에게 이 취미로는 충분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다른 말썽도 멈추지 않았으니까요. 

 

 엄마인 에바는 자신의 욕구를 다른 방향으로 돌리는 데 그게 케빈을 양육하는 겁니다. 그게 케빈의 방을 뒤지는 것으로 장면입니다. 그 결과, 에바 자신의 컴퓨터에 바이러스를 깔게 됩니다. 바이러스로 먹통이 된 컴퓨터 때문에 에바와 케빈은 다시 한 번 대화를 나눕니다. 이 때 케빈이 There is no point, That's the point, 아무 문제가 없는 게 문제라고 말합니다. 감독은 이 대사를 통해 대다수의 사람들이 엄마인 에바가 하는 것을, 엄마로써 해야할 것으로 문제가 없는 행위로 본다는 것을 문제삼는 겁니다. 가로막힌 엄마들의 욕구가 케빈같은 비뚤어진 아이를 낳게 되는 건데 말입니다. 그래서 주조로 쓰이는 붉은 색은 이 욕구의 흐름과 같이 화면에 나타나게 되는 겁니다.

 

 

 영화를 보면 에바의 남편에 대해서 답답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감독은 이 가로막힌 욕구의 원인을 남편으로 봅니다. 때문에 성관계를 가질 때에도 에바는 즐거운 표정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에바의 남편이 그녀를 임신시키고, 이사를 가게하고, 아이들만을 돌보게 만들었음과 동시에 케빈이 말썽을 부릴 때 "이건 그 나이 애들은 당연한 거야"라고 당연시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부권사회에 대해 강한 비판을 하고 있는 거죠.

 

 이 비판은 충격적인 결말을 맞게 되는데 케빈이 반사회적인 행위와 동시에 아버지와 동생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이 행위는 놀랍게도 에바의 욕구를 어느정도 해결해줍니다. 남편과 동생, 그리고 케빈이 감옥으로 사라짐으로써 에바는 자신의 직업을 가지게 되는 겁니다. 케빈이 "자신의 행위의 이유를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모르겠다"고 한 이유는 어머니가 직업을 가짐으로써 욕구가 해결되고 자신을 돌볼 이유가 사라졌음에도 면회를 오고 고통스러워하기 때문입니다. 부권사회의 잘못된 구조 속에서 갈 길을 잃은 모성에 대해 말할 필요가 있기에 여자로써 린 램지는 '케빈에 대하여 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posted by 상도동너구리

 

 다른 영화들과 비교해보자면, 2008년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 이후 거장들은 이런 테마를 계속 이야기하고 싶은가봅니다. 특히 잘나가는 사람의 몰락을 그렸다는 점에서 마틴 스콜세지의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와 비슷합니다. 또 얼마 전 데이빗 러셀의 <아메리칸 허슬>과도 같습니다. 두 작품보다 <블루 재스민>이 더 좋다고 한다면 그 이유는 덜 노골적이라는 것, 그리고 더 현실적이라는 것, 마지막으로 짧은 데도 이야기의 힘이 있다는 겁니다.

 

 전 작에 비교해보자면, <로마 위드 러브>, <미드나잇 인 파리>는 유럽의 전통적인 것들에 기반해서 이야기들을 환상적이고 긍정적으로 끝맺습니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블루 재스민>은 전작들과 꽤 다릅니다. 좀 더 씁쓸하고 냉정한 결말이죠. 그래서인지 코미디, 로맨스적인 요소도 거의 없습니다. 대신 <블루 재스민>에서는 케이트 블란쳇의 연기가 뛰어납니다.     

 

 

 영화를 보면, 엉뚱하게 미국문학이 떠오릅니다. 미국문학의 특징 중 하나는 아버지를 부정하고 어머니는 거의 없는 존재로 설정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인공들은 '고아'이거나 비슷한 상태입니다. 재스민과 진저도 입양아였죠. 다른 특징으로 아메리칸 드림입니다. 그걸 대표하는 말이 재스민이 비행기에서 내려 하는 말인 "Go west" 입니다. 또 '열심히 일하면 일한만큼 번다'는 사상도 늘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로 미루어봤을 때, 재스민은 아주 미국적인 사람입니다.

 

 영화는 두 가지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가지는 사치스럽고 금빛이 감도는 때, 다른 한 가지는 멈추지 못하는 전차를 탄 듯 나락으로의 모습입니다. <미드나잇 인 파리>나 <로마 위드 러브>에서 인물들이 결론적으로는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과는 상당히 다릅니다. 분명히 감독은 유럽에서와 다르게 미국에 돌아와 뭔가 안타까운 것을 느낀 겁니다.

 

 재스민은 경제력을 굉장히 원합니다. 그게 돈 있는 남자에게 의존하는 걸로 표현됩니다. 그리고 그녀는 거짓말을 잘합니다. 현실과 맞지 않는 1등석부터 바람 피는 것을 의심하는 자신을 속이는 거짓까지 그렇죠. 또한 그녀의 행동이 낳는 건, '파괴'입니다. 진저와 전남편이 헤어지게 된 것도 재스민으로 인한 것이고, 자신의 가정을 파괴하는 것도 그녀 자신입니다. 미국처럼 경제력을 원하고, 현실을 외면하는 거짓을 하고, 남는 건 파괴죠.

 

 이 과정을 우디 앨런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오마주로 사용합니다. 이 작품과 <블루 재스민>이 다른 점은 동생이 바람을 핀다는 점입니다. 재스민에게 동화된 진저가 파티에 가 유부남과 바람을 피는데, 이 때 마치 재스민처럼 자신을 속이고 경제력을 추구하고 가정을 파괴하려 합니다. 일탈의 결과는 진저도 재스민처럼 공허한 실패를 맞이하게 됩니다. 하지만 진저는 재스민과 다르게 정신질환을 겪지는 않고 일상으로 돌아옵니다. 오마주와 또 다른 점은 '입양한' 아들이 있다는 겁니다. 영화를 보다가 굳이 나오지도 않아도 되는 아들이 나올 때는 이유가 있겠죠. 우디 앨런은 대비를 통해 우리가 의지할 것은 더 이상 아메리칸 드림이 아닌 무언가라고 말합니다.

 

 

posted by 상도동너구리

 

 

 <인크레더블 헐크>는 전 편보다 작아진 헐크가 도시 속을 누비기에는 더 괜찮았습니다. 배우들이 눈에 들어왔는데 에드워드 노튼은 원래 연구자였던 헐크의 본래 직업과 잘 어울리는 것 같았고, 반지의 제왕에서 아르웬으로 나와 욕망에 휩싸이는 걸 막아주었던 리브 타일러가 <인크레더블 헐크>에서도 마찬가지로 헐크의 욕망을 잠재워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의외의 인물은 모던패밀리의 타이 버렐이 나와 정말 평범한 사람이 행동할 것처럼 행동하는 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나이트>는 <인크레더블 헐크>에 비해 굉장히 호평받고있고 누군가는 현대의 고전이라고 부를 정도의 영화라 시리즈를 다 본 후, 짜임새에 놀랄 수 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최근에 <아메리칸 허슬>에서 크리스찬 베일의 모습과 대조되는 배트맨도 볼만합니다. 흥미로운건 감독의 영화에 자주 출현하는 크리스찬 베일, 마이클 케인, 앤 해서웨이, 모건 프리먼은 외국에서 '놀란의 사단'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굳이 티켓파워를 비교하자면 배트맨시리즈 쪽이 좀 더 우세하지 않나 싶습니다.

 

 

 영화 <인크레더블 헐크>의 내용은 제작사인 마블의 진로에 맞도록 복잡한 이야기는 줄이고 이해하기 쉽게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특히 영화의 앞부분이 그러합니다. 감독은 이해하기 쉽고 빠르게 헐크가 처해있는 상황을 장면을 통해 요약합니다. 특히 브루스 배너가 장군으로부터 쫓길 때, 군대와 불량배들에게 쫓기는 장면은 헐크가 사회에 어떤 계층으로부터 유리되어 혼자인 상태를 보여줍니다.

 

 브루스 배너가 소외되는 원인은 바로 사람들의 욕망때문입니다. 인물들은 인간을 뛰어넘는 그 힘에 대해 갈망합니다. 그러나 장군이 자신의 과오를 덮기위해 헐크를 잡는 것이나 과학자의 직업적인 욕망 또한 있습니다. 놀랐던 장면은 브루스가 연인과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장면까지 나와 브루스 배너가 철저히 혼자인 장면입니다.

 

 

 반면에 DC가 제작사인 <다크나이트>시리즈는 좀 더 깊고 진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감독의 이야기 구성법은 마치 마술쇼의 구성과 같습니다. 당연한 것을 보여주고, 일시적으로 사라진 후, 다시 돌아오게 하는 겁니다. 감독의 다른 영화 <프레스티지>에서 잘 나타나죠. 각각의 시리즈마다 배트맨은 고담에서 사라짐을 반복하는 구성을 통해서 명성(프레스티지)를 얻을 수 밖에 없는 거죠. 명성으로 인해 배트맨은 헐크와 반대로 고든이나 폭스같은 조력자들이 있습니다.

 

 

 이쯤에서 녹색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화가들이 초록색을 사용하기 위해 독소를 사용했던 것으로부터 유래했기 때문에 우리가 흔히 아는 자연의 녹색과 다르게 독약이나 괴물을 표현할 때 자주 쓰이는 것 같습니다. <슈렉>, <마스크>에서도 그렇죠. 하지만 <인크레더블 헐크>의 녹색이 가지는 의미는 <위대한 개츠비>의 디카프리오가 열망하던 녹색에 더 가깝습니다. 개츠비가 여자를 얻기 위해 위선적인 사업을 했듯이, 배너를 제외한 인물들은 욕망을 이루기위해 위선적인 일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녹색 괴물의 힘을 봤을 때 두려움보다는 인물들은 경이로움을 감추지 못하는 장면이 이 같은 맥락입니다.

 

 

 

 <인크레더블 헐크>의 특이한 점은 개인과 사회의 욕망들로부터 주어진 힘을 다루는 방법입니다. 헐크가 변신하면 내뱉는 몇 안되는 말 중 'Leave me alone'이라는 말이 그 방법을 말해줍니다. 감독은 거대한 힘이 주어지면 그것은 사회적 제도라던지 과학의 이론이 통제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개인의 선한 선택'이 답이라고 말합니다. 개인을 제외한 다른 것들은 욕망으로 가득차있다는 비관적인 시선으로 보는 겁니다.

 

 

 그에 비해 크리스토퍼 놀란은 같은 문제인 힘에 대해서 이상주의자일 수 있겠습니다. <배트맨 비긴즈>에서 고담시는 표출하는 욕망들로 가득찬 도시입니다. 욕망으로 가득찬 사회가 가진 건 헐크처럼 위험한 것들 투성입니다. 군사기술, 핵무기, 조커같은 정신이상자가 그런겁니다. 욕망과 위험의 사회 속, 감독은<다크나이트 라이즈>에서 그 답을 누군가로부터 비롯되는 희망이라고 얘기합니다. 경찰인 고든이 어린 웨인에게 줬던 코트가 회상되는 장면이 바로 그런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인크레더블 헐크>와 <다크나이트>의 공통점은 '브루스'에서부터 주인공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양면성,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의 불안, 불안 속에서 힘과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같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인크레더블 헐크>는 자신 외의 다른 것들은 믿지 못하는 냉정함이 깔려있고, <다크나이트>에서는 사람들 속에서 전해지는 희망이 있다고 얘기합니다. 대조적인 장면으로 <인크레더블 헐크>에서는 브루스가 자신을 믿으라며 비행기에서 떨어지는 반면에 <다크나이트 라이즈>에서는 브루스가 감옥에서 희망을 보고 일어섭니다. 08년도의 <인크레더블 헐크>에게 12년도의 <다크나이트 라이즈>는 무서워하지말고 믿어야 미래가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여 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비슷한듯 다른 두 영화를 비교해보았습니다.     

 

 

   

posted by 상도동너구리

 


테이크 쉘터 (2013)

Take Shelter 
7.5
감독
제프 니콜스
출연
마이클 섀넌, 제시카 차스테인, 쉬어 윙햄, 캐시 베이커, 케이티 믹슨
정보
드라마 | 미국 | 120 분 | 2013-04-18
다운로드

 

 <테이크 쉘터>를 봤습니다. 감독의 다른 작품인 <머드>보다 좀 더 강한 인상을 주는 작품인 것 같습니다. 특히 마이클 섀넌은 혼란스러운 상황을 잘 표현하는 배우인 듯 합니다. 그래서인지 감독인 제프니콜스의 작품에 <테이크 쉘터>의 주연부터 <머드>의 조연고, 앞으로 나올 <미드나잇 스폐셜>에도 출연할 예정입니다. 작품 자체는 가볍게, 재미를 위해 볼만한 내용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히 이야기를 차분히 따라가다보면 강한 인상을 받게 되죠. 때문에 추천합니다.

 

본격적으로 리뷰를 시작해보겠습니다. 스포일러가 있으므로 아래로는 영화를 본 후에 보길 바랍니다.

 

 

 

 영화는 '혼란'에 중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테이크 쉘터>는 쉽게 접할 수 있는 영화들과 다르게 이 혼란을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합니다. 처음 영화가 시작하게 되면 관객은 커티스의 꿈을 보게 됩니다. 실제로 폭풍우가 올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재난 영화인가 싶은 생각이 들죠.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좀 심한 비정도라는 걸 알게 됩니다. 그리곤 점점 꿈과 현실 사이에서 이상해져가는 커티스를 볼 수 있습니다.

 

 커티스의 혼란 정도는 점점 감당할 수 없어지다가 첫 번째 폭풍우를 만나고 방공호에 숨고, 그 폭풍우가 견딜만 했다는 것을 보고나서야 정상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관객들이 쉽게 예상할 수 없는 두 번째 폭풍우는 '뭐야?'하는 생각이 들게 하죠. 이 폭풍우가 진짜일지 아닐지에 대해서 영화는 균형감있게 증거를 제시합니다.

 

 

 그 동안 커티스의 꿈에서는 커티스를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은 감정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과 마지막 장면의 구성이 커티스의 관점이라기보다는 그의 아내 사만다에게 맞춰져 있죠. 이게 두 번째 폭풍우가 현실이라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꿈이라는 증거는 영화의 초반, 사만다는 아이가 못달린 판자를 가지고 노는 것을 보고도 놀라는데 폭풍우가 현실이였다면 차분히 "Okay"라고만 하지 않았겠다는 겁니다. 게다가 마지막 바로 앞의 장면은 정신과 전문의가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합니다."라고 말한 직후이기도 하구요. 혼란스러운 결말이죠!

 

 영화를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이성과 비이성'이 아닐까 싶습니다. 꿈은 대표적인 '비이성'이죠. 그런 꿈을 꾸는 커티스를 다른 사람들은 이상한 것으로 봅니다. 대표적인 장면이 치료를 받는 장면입니다. 처음 병원에서는 진정제를 주지만 효과가 없습니다. 또 상담사를 찾아가도, 다른 상담사가 와도 소용이 없습니다. 세 번 모두 공통적으로 '커티스의 어머니'에 대해 묻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런 증상조차 없었습니다. '이성'의 한계가 드러납니다. 커티스가 해고 되었을 때 사만다의 위로도 결국 커티스를 꿈에서 헤어나오게 하지못합니다. 오히려 라이온스 클럽에서 소리치게 만들죠. 듀워트도 마찬가지입니다.

 

 

 

 관객이 혼란스러운 것은 논리적이지 못한 '비이성'이 자꾸만 승리하기 때문입니다. 꿈 속에서는 미친 것 같은 강아지가, 아내가, 폭풍우가 커티스를 이기고, 현실에서는 미친 것 같은 커티스가 듀워트를 이기고, 상담사보다 잘 알고, 결국 첫 번째 폭풍우에 방공호가 쓰이죠. 이런 맥락에서 두 번째 폭풍우가 실제이거나 가상이거나의 차이는 없습니다. 실제일 경우에는 커티스의 미친 것만 같았다는 것이 사실은 예지몽이었다는 승리가 되고 가상일 경우에는 전문치료사의 처방도 소용이 없다는 승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노아의 방주이야기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최근에는 노아의 방주가 진실이었다는 이야기도 있지요. 그러나 노아의 방주가 진실이었던 거짓이었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영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더불어, <테이크 쉘터>는 폭풍우같은 자연스러운 공포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그 공포를 보여주는데, 영화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경제가 그렇습니다. 약, 방독면, 아이의 치료비, 심지어 방공호(쉘터)를 만드는 비용조차도 값이 비싸죠. 가족을 무너뜨리는 것은 오히려 경제적인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메소포타미아가 주기적인 홍수로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탄생시킨 것처럼, 경기순환이 끝없이 상향과 하향을 반복하는 것 때문에 영화 <테이크 쉘터>가 나온 것 아닐지 생각해봤습니다. 

 

 

posted by 상도동너구리

 

 

<인 더 하우스>를 봤습니다. 얼마 전 봤던 <영 앤 뷰티풀>과 몇 가지 공통점을 갖는 것 같습니다. 두 작품 모두 섹슈얼리티에 관한 이야기가 내재되어 있고, 사춘기의 주인공, 어른인 남자에 대한 냉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인 더 하우스>가 <영 앤 뷰티풀>보다 좀 더 좋았습니다. 왜냐면 홍상수 감독의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에서처럼 인물이 직접하는 것과 상상 혹은 기억으로 관객에게 이야기 해 주는 것, 두 가지가 있어 이야기가 좀 더 풍성한 느낌이 들어서입니다.

 

 

본격적으로 리뷰를 시작하겠습니다.

 

 시작은 제르망 선생님의 개학부터 시작합니다. 방학이 끝난 학교에서는 새로운 교육정책을 시행합니다. 평등한 교육을 하겠다는 명목으로 학생들에게 교복을 입히는 거죠. 얼핏 보면 다 같은 학생으로 보입니다. 이 중에서도 카메라는 한 명만을 비추는데 클로드라는 학생입니다. 오프닝 시퀀스는 기존 체제, 관습을 대변하는 학교와 그에 비해 작은 클로드를 보여주면서 앞으로 클로드의 행보를 암시합니다. 처음 볼 때는 느끼지 못하나 다시 보면 흥미로운 오프닝 시퀀스이죠.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제르망과 클로드는 과제를 통해 만납니다. 특이하게도 클로드는 마치 한 편의 소설같은 과제를 제르망에게 보여줍니다. 이 때부터 클로드가 쓰는 글과 제르망과 클로드의 수업, 제르망의 가정 이렇게 세 가지의 주된 이야기로 진행합니다.

 

 

 

 

 먼저 클로드의 글은 마치 막장 드라마 한 편을 보는 것 같습니다. 사실주의 글처럼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친구의 엄마를 탐해 접근하는 내용이죠. 그러나 막장 드라마와 다른 점은 클로드가 써서 전해주는 글이 영상화 된 것이기 때문에 클로드가 친구의 가족과 친해질수록 불순한 생각을 들킬까하는 서스펜스를 끝까지 유지한다는 겁니다.

 

 제르망이 클로드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글을 잘 쓰는 법입니다. 또 이것은 <인 더 하우스>에도 대체로 적용이 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제르망은 "각 인물은 뭔가를 갈망하는데, 그걸 방해하는 뭔가 있어야 한다. 역경이 찾아오는 거지."라고 가르쳐주는데 클로드는 이 내용을 글의 주인공인 클로드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 뿐만아니라 영화에 출연하는 대부분의 인물에 적용합니다. 클로드 자신은 오이디푸스처럼 '엄마'라는 존재에 대해 갈망하고 친구의 엄마는 인테리어 공부에, 제르망은 글 쓰는 재능에 대해 갈망하죠. 또 친구인 라파나 라파의 아빠, 제르망의 부인 조차도 각각의 갈망과 역경을 갖습니다.

 

 제르망은 앞서 말했듯이 재능에 대해 갈망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클로드를 통해 해결해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영악한 클로드가 시험치를 훔치라는 역경을 주죠. 그리고 제르망의 아내는 계속하는 것을 갈망합니다. '미노타우르스'라는 갤러리를 계속 운영하는 것을 원하고 충실한 클로드의 독자로서 이야기가 계속 되는 것을 원합니다. 그래서 라파의 가족을 갤러리 파티에 초대하기도 하죠.

 

 

 영화의 중반까지 세 이야기는 각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재밌는 글을 위해 제르망이 "캐릭터를 살려봐"라고 말하면서 세 이야기가 서서히 엮입니다. 라파가 제르망의 수업 때 망신을 당하고 라파가 복수를 클로드와 이야기하고, 이 때 제르망이 옆에서 조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위의 사진처럼 말이죠. 그리고 학교신문에 제르망에 대한 라파의 분노 글이 나오고 그것을 제르망의 부인도 읽고, 라파의 아버지도 제르망을 만나게 됩니다. 이제는 클로드의 글 안으로 세 이야기가 들어온거죠.

 

 현실이 우선인 건지 클로드의 글이나 제르망의 조언이 우선인건지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제르망의 부인이 라파의 부모님을 초대한 것이 클로드의 글때문이고, "캐릭터를 살려봐"라는 조언으로 제르망은 자신의 수업 때 라파를 지명하는 게 그렇죠. 이 외에도 영화를 보면 그런 것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가 말한 '가상실재의 미혹'과 궤를 같이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화는 놀라운 장면들을 쌓아가며 마지막으로 향합니다. 제르망은 갈망을 멈추지 못하고 "성공적인 엔딩은 의외의 결론이지만 다른 대안은 없다"라는 조언을 클로드에게 합니다. <인 더 하우스>는 제르망의 가르침과 같이 클로드의 갈망과 역경의 해결을 정말 의외의 것으로 끝냅니다. 영화 중, 제르망이 글에 대해 말했던 풍자극, 사실주의 이야기는 영화에 그대로 적용되고 제르망이 클로드의 글에 느낀 것처럼 관객도 마찬가지로 흥미를 느낄 수 밖에 없는 영화입니다. 

 

 

posted by 상도동너구리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2013)

Nobody’s daughter Haewon 
7.2
감독
홍상수
출연
정은채, 이선균, 김자옥, 기주봉, 김의성
정보
드라마 | 한국 | 90 분 | 2013-02-28
다운로드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을 봤습니다. 영화는 보면서 특이하다고 생각하는 점이 많았습니다. 먼저 기억과 꿈을 이용하는데, 같은 것을 도구로 삼았던 다른 영화들보다 더 현실적이라는 점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다양하게 볼 수 있는 여지가 많아 작품이라는 점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았습니다. 또 롱테이크 기법 등 촬영 기법이 눈에 띄게 특이합니다.

 

 

 본격적으로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에 대해 생각을 정리해보았습니다. 먼저 해원이 '어제'의 일기를 쓰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영화에서 종종 뭔가 논리적이지 않은 대화가 오고가는데, 그 이유는 해원이 '어제'의 일기를 쓰기 때문으로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식당에 먼저 도착해 잠깐 잠이 들었노라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꿈'이 처음 등장합니다. 처음 꿈에서는 해원이 만나고 싶었던 제인 버킨을 만납니다. 해원의 꿈인만큼 그녀가 듣고싶은 영어를 잘했다거나 제인 버킨의 딸과 닮았다거나 하는 자신이 원하는 말을 듣는 일이 벌어집니다.

 

 잠에서 깨고 난 현실에서 해원은 엄마와 시간을 보냅니다. 엄마와 어떤 곳(공원, 도서관, 학교)에 들어가보려 하는데 엄마는 입구에서 보려고만 합니다. 여기서 현실을 안타까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직로를 나와 한 카페 앞에 멈춰 쌓여있는 책을 봅니다. 여기서 해원은 책을 사지 않는데 그 이유를 '집에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어서'라고 말합니다. 사람의 기억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넌지시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기억과 경험이 온전하지 않다는 것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엄마라는 존재가 버젓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제목이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를 제인 버킨을 만나는 꿈과 엄마를 만나는 현실의 차이에서 생각해봤습니다. 꿈에서 해원이 만나고 싶어한 제인 버킨은 배우인 딸을 두고 있는데, 그녀의 딸 또한 훌륭한 배우, 진짜 예술가라고 표현합니다. 해원은 그녀의 딸처럼 될 수 있다면 영혼까지 팔거라고 말하죠. 그러나 엄마와 만났던 해원의 현실은 그에 한참 미치지 못합니다. 따라서 "누구의 딸도 아닌"은 현실에서 해원의 부족함을 나타낸다고 생각합니다. 제인 버킨과 딸처럼 엄마가 딸을 돌봐주고 자랑스러워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엄마와 관련한 현실과 꿈의 비교가 끝나고 이 교수가 등장합니다. 이번에는 엄마와 헤어진 것과 이어 현실부터 보여줍니다. 이 교수와의 관계는 딸로서 해원의 현실과 마찬가지로 슬프고 안타깝습니다. 불륜관계이기 때문이죠. 또한 이 교수는 해원이 원하는 바와 여러 가지 면에서 꽤 먼 사람입니다. 술자리에서 대화를 보면, 이 교수는 자신이 제작한 영화에서 모순을 가지고 있고, 거짓말을 만들어내며, 진실하게 말하는 용기도 없습니다. 이런 그의 대칭점으로 꿈 속에서는 또 다른 교수가 등장합니다. 다른 사람은 미국에서 교수를 하며, 대통령을 만났고 유명한 영화감독과 통화를 하고 이혼을 진실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입니다.

 

 

 또 술자리에서는 해원에 대해 혼혈이라는 것, 부자라는 것, 1년이나 사귄 남자친구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진실인지 거짓인지 확실히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한산성에서 갈등을 빚게 됩니다. 이런 것을 보고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이 떠오릅니다. 이 교수에게 사랑하는 해원이 우선하는 게 아니라 해원에 대한 소문이 우선인 모습이 이를 떠올리게 하죠. 담배에 대한 생각이라던가 어제를 쓰는 일기, 책에 대한 기억은 이런 이론과 맥을 같이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영화의 종반으로 오면, 해원은 현실에서 이 교수와 싸웠을 때 가지 못했던 남한산성의 길을 혼자서 가봅니다. 남한산성은 현실에서 이 교수가 다리가 후들거리면서 간 곳이고 해원과 교수가 다름을 확인하고 갈등을 겪는 곳입니다. 마치 그 둘의 연애사와 같습니다. 그런 길을 해원이 혼자 가는 것은 헤어지는 것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교수의 진실하고 용기있는 모습은 해원과 헤어지는 것을 통해 보여집니다. 꿈이지만 말이죠.

 

 여태까지 해원의 꿈 속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나오지만 그 누구도 해원을 '위로'해주지는 않습니다. 분명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할텐데 말입니다. 그래서 해원은 꿈 속에서 그녀 자신한테하는 위로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꿈에서 깬 해원의 대사는 "꿈에 본 아저씨는 전에 봤던 착한 아저씨인 것 같았다"이죠. 인물들 중에서 그녀의 기억 속에 착한 아저씨는 우연히 "좋은 날입니다."라고 해줬던 아저씨입니다. 아저씨가 주는 막걸리로 위로를 받고 아직 남한산성을 내려가지 않은 울고있는 교수를 다독입니다. 이로써 영화는 앞으로 둘의 관계를 관객의 상상에 맡겨버리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마지막으로 미장센(시각적 요소의 배열)이 기억에 남습니다. 해원의 패션이 뒤쳐지는 것과 멈춰서 대화하는 것입니다. 영화를 보면 해원은 마치 20년 전의 스타일처럼 나팔바지와 컨버스, 이상한 코트를 고집합니다. 홍상수 감독이 이런 것에 신경을 안써서 일수도 있지만 상투성을 경계하는 감독의 스타일에 기반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인터뷰에서 홍상수 감독은 "멋있다는 건 이전의 본 이미지가 환기되어 멋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고, 생생한 요소들이 힘을 발휘하는데 막이 덮이는 느낌"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따라서 해원의 이상한 패션은 해원과 교수의 관계에서 관객이 해원이 예쁘게 보여서 오판을 하는 것을 막기위함이 아닐까 싶습니다. 같은 맥락으로 영화는 팬(Pan)과 틸트(Tilt)라는 기본적인 카메라 움직임(고정축을 갖는)에 의해서만 촬영되었습니다. 때문에 배우들이 움직이면서 대화를 하게 되면 카메라가 고정된 축을 가지기 힘들기에 가능한 멈춰서 이야기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런 움직임을 영화 내내 고수하는 이유는 마찬가지로 상투성을 경계해서라고 추측해봅니다.

 

 이런 일상적인 소재와 사실주의적인 표현으로 어려운 주제를 한정적이지 않게 던져주는 영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posted by 상도동너구리

 


열한시 (2013)

AM 11:00 
6.7
감독
김현석
출연
정재영, 최다니엘, 김옥빈, 이대연, 박철민
정보
스릴러 | 한국 | 99 분 | 2013-11-28
다운로드

 

 <열한시>를 봤습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하는 소재는 우리나라에서 잘 사용하지 않았던 소재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많이 접할 수 있어 식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나싶습니다.

 

 

 영화의 시작에서는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라는 문구로 시작합니다. 그렇기 때문인지 영화를 보면서 종교적인 것들도 눈에 띄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의 연장선이 예정설을 떠오르게 만듭니다. 그러나 처음과 다르게 작품의 끝을 모호하게 만들어 애매한 느낌이 듭니다.

 

 한 가지 더 생각나는 것은 분절된 이야기가 아닌데 옴니버스 영화같은 느낌을 줍니다. 모든 인물들이 공유하는 것은 서로 타임머신을 만들러 해저에 있다는 것뿐입니다. 때문에 단독으로 나오는 장면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각자의 이야기들이 모두 멋지게 연결되는 게 아니라 일부만 과거회상으로 기워집니다. 때문에 조연들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는 기반이 약하고 단순합니다. 예를 들어 박사 컴플렉스에 대해 연신 말해대지만 그에 관한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박영식이 예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살아남은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 사이에 어떤 차이도 발견할 수 없는 것도 아쉽습니다. <인사이드 르윈>에서 반복되는 과거와 현재 속에서도 차이를 통해서 뭔가 진전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열한시>는 곰곰히 생각했을 때 어떤 차이도 없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살아남은 사람들도 죽은 사람들과 똑같이 살려고 했고 누군가를 죽이려고도 했으며 사랑하는 것도 같은데 말입니다.

 

 이런 이유들로 새로운 장르에 대해 시도는 좋았으나 많은 것들로 좀 어수선한 느낌의 영화였습니다.

 

 

 

 

 

posted by 상도동너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