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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다

<케빈에 대하여> 나름의 해석

 

 

 영화를 보고, 또 보고, 또 봐도 이해하기 힘든 작품입니다. 이유는 <케빈에 대하여>가 많은 것들이 익숙하지 않아서겠지요. 가장 먼저 저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은 감독입니다. 린 램지, 이 영화 이전에는 들어보지 못했으나 영국에서는 이미 젊은 거장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감독이 이야기를 조명하는 방식 또한 익숙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우디 앨런의 <블루 재스민>처럼 인물이 지금의 현실에서 과거로 회상하는 방식을 취하는데, 회상하는 영화들이 대부분 시간적인 흐름이나 인과를 지키는 반면에 <케빈에 대하여>는 최소한의 시간적인 설명도 부족합니다. 게다가 파편적인 많은 사실들이 나오기도 합니다. 파편적인 사실들을 묶어주는 유일한 것은 바둑에서 한 게임이 끝나고 복기해보는 것과 비슷합니다. 에바는 무엇때문에 이런 사건이 일어났는지 복기해보는 겁니다.

 

 처음 그녀가 복기하는, 그러니까 영화의 시작 장면은 토마토축제입니다. 영화를 관통하는 붉은 색의 시작이기도 하구요. 처음 축제 장면은 즐겁게 비춰집니다. 그러나 에바는 사람들 위에서 즐거워하다가 이내 비명과 함께 바닥으로 내려옵니다. 이 과정은 에바가 겪는 과정과 같습니다. 에바의 직업은 사람들에게 추켜세워질만한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케빈을 임신하게 되면서 에바는 자신이 원하는  직업, 여행, 자신의 생활 같은 것들을 포기하게 됩니다. 전설적인 모험가에서 누군가의 아내로, 사람들의 손에서 내려온 거죠. 

 

 

 이것에 대한 분노는 에바가 지도로 채운 자신의 방을 어린 케빈이 망쳐놨을 때 잘드러납니다. 에바가 방에 대해 언급한 것처럼 방은 사람들의 내면을 나타냅니다. 에바가 방을 지도로 꾸민 것은 케빈을 갖기 이전 추앙받는 모험가로 돌아가고 싶은 욕구의 표출입니다. 그러므로 에바에게 꾸며놓은 방을 망쳐놓은 케빈은 큰 장애물로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겁니다. 케빈은 이것을 태어나기 전부터 느꼈을 겁니다. 틸다 스윈튼이 고통을 느꼈을 때와 같은 표정으로 임신한 상태를 연기하는 게 그런 이유입니다.

 

 케빈때문에 적절히 욕구를 표출하지 못한 에바 밑에서 케빈 또한 적절한 욕구의 표출을 모릅니다. 때문에 욕구를 표출하기 위해서 생리현상부터 시작해서 갖가지 말썽을 부립니다. 그러다가 유일하게 적절해 보이는 활을 쏘는 걸 취미로 삼게 됩니다. 이 때 엄마에게 안기죠. 그러나 성장한 케빈에게 이 취미로는 충분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다른 말썽도 멈추지 않았으니까요. 

 

 엄마인 에바는 자신의 욕구를 다른 방향으로 돌리는 데 그게 케빈을 양육하는 겁니다. 그게 케빈의 방을 뒤지는 것으로 장면입니다. 그 결과, 에바 자신의 컴퓨터에 바이러스를 깔게 됩니다. 바이러스로 먹통이 된 컴퓨터 때문에 에바와 케빈은 다시 한 번 대화를 나눕니다. 이 때 케빈이 There is no point, That's the point, 아무 문제가 없는 게 문제라고 말합니다. 감독은 이 대사를 통해 대다수의 사람들이 엄마인 에바가 하는 것을, 엄마로써 해야할 것으로 문제가 없는 행위로 본다는 것을 문제삼는 겁니다. 가로막힌 엄마들의 욕구가 케빈같은 비뚤어진 아이를 낳게 되는 건데 말입니다. 그래서 주조로 쓰이는 붉은 색은 이 욕구의 흐름과 같이 화면에 나타나게 되는 겁니다.

 

 

 영화를 보면 에바의 남편에 대해서 답답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감독은 이 가로막힌 욕구의 원인을 남편으로 봅니다. 때문에 성관계를 가질 때에도 에바는 즐거운 표정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에바의 남편이 그녀를 임신시키고, 이사를 가게하고, 아이들만을 돌보게 만들었음과 동시에 케빈이 말썽을 부릴 때 "이건 그 나이 애들은 당연한 거야"라고 당연시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부권사회에 대해 강한 비판을 하고 있는 거죠.

 

 이 비판은 충격적인 결말을 맞게 되는데 케빈이 반사회적인 행위와 동시에 아버지와 동생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이 행위는 놀랍게도 에바의 욕구를 어느정도 해결해줍니다. 남편과 동생, 그리고 케빈이 감옥으로 사라짐으로써 에바는 자신의 직업을 가지게 되는 겁니다. 케빈이 "자신의 행위의 이유를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모르겠다"고 한 이유는 어머니가 직업을 가짐으로써 욕구가 해결되고 자신을 돌볼 이유가 사라졌음에도 면회를 오고 고통스러워하기 때문입니다. 부권사회의 잘못된 구조 속에서 갈 길을 잃은 모성에 대해 말할 필요가 있기에 여자로써 린 램지는 '케빈에 대하여 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